가장야한사진 ⒲ 초스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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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야한사진






















가장야한사진 새벽에 먼동이 어둠을 밀어 하루를 여는 시간. 한국의 대표적인 부촌(富村)으로 꼽히는 강남구 청담동, 사람이 없는 골목을 따라 질주해 들 어오는 은색 스포츠카가 있었다.
대당 2억을 호가한다는 포르셰 GT2는 2차선 도로 폭의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저택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대궐 같은 화려함을 자랑하는 사자장식의 대문 앞에서 멈췄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큰 키의 젊은 남자였다.
탄탄한 체격에 까무잡잡한 피부가 지극히 섹시 한 느낌을 풍기는 그의 얼굴은 앳된 미소년과 어른 남자의 중간쯤에 와 있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아래층 거실에는 환하게 불이 커져 있었다.
새벽잠이 없는 노인들답게 할 아버지와 할머니는 http://yahaha.kbsyo.com 이미 일어나계신 모양이었다.
제후는 일각의 망설임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어나셨어요? 아침 일찍부터 어딜 다녀오는 게냐? 산책이요. 제후는 픽 웃으면서 신문을 보고 있는 권 회장의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며칠동안 집에 들어 오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저런 말씀이 나오다니 영감 인내심도 참 대단하단 말야. 권 회장이 돋보기안경 너머로 손자의 옷차림을 살폈다.
지금 제후가 입고 있는 옷은 근사한 와인 파티에 어울리는 고급 정장이었다.
산책하는 사람 옷이 그게 뭐냐? 특이하잖아요. 두 번만 특이했다간 병원에서 호출할 거다.
그것도 괜찮죠, 한 일주일 푹 쉬다 나오면 보험료도 나올 테고. 근데 병명은 뭐가 좋을까 나 한 마디도 안 지고 말대답을 갖다 붙이는 손자였다.
권 회장은 혀를 쯧쯧 차다가 아침 준비 를 하다 말고 주방에서 나오는 아내에게 화살을 돌려 쏘았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뭐든 오냐 오냐 해주니까 애 버릇이 저렇게 없어진 거라고. 나 참, 원망하려거든 일찍 간 당신 아들과 며느리를 원망하시구려. 제후 버릇없어진 게 어 째 내 탓이우? 좀 가르치려고 회초리 들면 말린 사람은 영감 아니었소? 제후의 낯이 몰라보게 굳어졌다.
저 올라갈게요. 쉬세요. 그 바람에 부부간의 언쟁도 그쳤다.
얘야. 됐어요. 늦게 들어와서 죄송해요. 당신 때문에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뜬 아들 내 외 얘기만 나오면 눈에 띠게 미안해하셨다.
http://idaum.daumeing.net 제후는 그게 싫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남긴 하나뿐인 손자라고 특별대접을 받는 것이 싫었다.
아무리 사고를 치 고 경찰서를 오락가락해도 이렇다 할 큰소리 한 번 내지 않는 두 분께 죄송하면서도 답답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야단을 맞고, 잘 한 것이 있으면 칭찬을 듣는 보통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자이고 싶었다.
방으로 돌아온 제후는 씻지도 않고 덜렁 침대에 드러누웠다.




며칠 전 집에서 나갈 때 엉망 이었던 방은 언제 어지러 졌었냐는 듯 깨끗이 정리가 되어 있었다.
젠장. 할머니가 치우셨을 것이다.
도우미 아줌마를 시키셔도 될 일을 할머니는 연세가 꽤 드신 지 금까지도 손자 방 청소만큼은 손수 해주셨다.
습관처럼 담배를 피워 물고 재를 떨다가 치이익, 종이 타는 소리에 피곤한 몸을 젖혀 일어 났다.
늘 그 자리에 있어야할 재떨이가 보이지 않고 대신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잠이 올 듯 말 듯 몽롱한 눈에도 확 들어오는 인상이었다.
크고 동그란 눈에 귀여운 코, 핑 크색 입술이 인형 같은 여자아이였다.
얼굴은 하얗고 머리는 까맸다.
풋 예쁘네. 누군지도 모르면서 제후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자아이는 어른스런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기껏 해봤자 열일곱이나 될까 말까 어려 보였다.
알게 뭐야. 근데 할머니는 왜 처음 보는 여자 애 사진을 내 방에다 갖다 놓으신 거지?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닐 테니 잠이나 자자고 제후는 팔을 침대 머리맡으로 뻗어 방 불을 껐 다.
밤을 꼴딱 새고 들어왔으니 오늘도 학교 가기는 그른 것 같다.
독립이요? 스무 개 계열사가 있는 대기업의 총수로 새벽 4시의 기상 이후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할아 버지셨지만 손자와의 점심을 위해 시간은 남겨놓으셨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제후는 호출을 받고 나갔다가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그래. 왜 싫으냐? 싫은 건 아니지만 의외의 말씀이라서요. 평생 장가도 안 보내고 옆에 끼고 사실 줄 알았 는데 말이죠. 네 할미야 그렇겠지만 나는 아니다.
녹차의 은은한 향과 맛을 음미하던 권 회장이 찻잔을 놓고 어느덧 스물넷의 나이에 이른 손 자를 바라보았다.
생전의 아들과 그의 모습을 빼닮은 귀한 혈육을. 제후야. 제후는 굳이 할아버지의 눈을 피하지 않고 쳐다보았다.
나는 네가 나를 도와 회사 일을 처리하기에는 어렵지만 남자의 인생을 걸고 뭔가에 도전 할 만한 나이는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요? 모름지기 남자란 직업적인 성공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지지해 줄 가정이 없으면 힘든 법이 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이 만큼 회사를 키울 수 있었던 건 집 안에서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해 준 네 할미의 공이 컸다.
요컨대 그 말씀은 대충 짐작은 하면서도 제후는 설마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해라. 예? 결혼이라고 했다.
네가 회사의 오너로서 자격이 있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 나는 너를 시험 하는 거다.
제후가 아는 한 할아버지는 농담을 모르는 분이셨다.
그래서 더 황당했다.
그런 손자를 보며 권 회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옛 어른의 말씀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했다.
자기 몸과 가정을 올바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비록 제후 네가 이 할애비의 눈 밖에 나려고 가당찮은 노력을 하고 있다만 네 놈 속은 꽉 차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나만 알아서는 안 된다.
네 할미와 집안 어른 들에게 그리고 장차 네 손에 생계를 맡길 대원 그룹의 사람들에게 네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줘야 한다.
. 제후야. 혹시사진 속의 그 아인가요? 권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네 아비와는 대학 동문이자 막역지우가 되는 사람의 딸이다.
내가 며 칠 전에 직접 만나봤는데 아이가 나이에 비해 아주 야무지고 똑똑하더구나. 하긴 일주일에 걸쳐 신입사원들의 최종 면접을 보시는 분이 보지도 않고 그런 중요한 일을 결정하셨을 리가 없지. 제후는 일단 만나보기나 하자고 마음먹었다.
벌써 결정이 난 건 가요? 그 아이는 어른들 뜻을 따르겠다고 했다.
신랑 될 사람 얼굴도 보지 않고 말이죠? 그 아이도 뭔가 생각하는 뜻이 있으니까 그렇겠지. 손자의 눈치를 보던 권 회장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측근을 불렀고 그는 키 하나를 놓고 나갔다.
네 거다.
청담동 본가에서 30분 쯤 떨어진 곳에 있는 빌란데 크기며 시설이 젊은 사람들 취향이라는 구나. 마음에 들면 그 아이랑 들어가 살 거라. 제가 만약 할아버지 말씀을 거절한다면요? 정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도 밀어붙이진 않을 게다.
대신에 그 때는 네 손에 쥔 키도 다른 사람의 것이 되겠지. 할아버지와 헤어진 제후는 다니는 대학으로 차를 몰았다.
놀랍게도 그의 예비 신부가 될 여 자는 같은 학교에 같은 과의 후배였다.
1학년 은 아란. 99학번 동기로 졸업을 하고 조교 일을 하는 친구에게 그녀의 이름을 대고 수업 스케줄을 물 었다.
학교 동편 경상대 건물에서 6교시 교양 수업이 마지막이란다.
시간이 좀 남았다.
유독 남자들이 많은 경상대 건물 앞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제후는 아란을 기다렸다.
3시가 되자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몇 씩 짝을 맞춰 나왔다.
커피 이후의 시간을 담배로 죽 이고 있던 제후의 눈은 여학생들만 쫓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을 알고 있으니 손만 잡아 데려오면 될 거라는 제후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모두 들 비슷비슷한 긴 생머리들을 하고 있어 헷갈렸다.
여자들을 기웃거리다가 제후는 할아버지가 알려준 아란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그러자 막 현관을 나가 도서관으로 난 도로를 걷던 학생들 중에서 한 사람이 걸음을 멈추었다.
여보세요? 자연스런 갈색이 풍부한 긴 생머리의 여학생이



폴더를 열어 귀에 가져다 댄다.
역광에 눈을 살짝 찌푸렸지만 사진 속의 그녀가 틀림없었다.
제후는 아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폴더를 닫고는 후다닥 뛰어갔다.
갑작스레 길을 막 은 미남자를 보며 아란을 비롯해 그녀의 친구들이 눈을 껌벅였다.
누구세요? 권 제후. 제후는 양해도 구하지 않고 아란의 손목부터 잡았다.
그리고 양 편에 선 그녀의 두 친구들 에게 말했다.
니들 말고 얘한테 볼 일이 있어. 급한 일 없으면 얘 좀 빌리자. 40분 뒤 제후와 아란은 둘이 같이 살게 될지도 모르는 빌라에 와 있었다.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다며? 취조하는 사람 마냥 아란을 앉혀 놓고 제후는 그녀 앞을 오락가락 했다.
네. 목소리가 다소곳하다.
미리 신부 수업이라도 받았나? 어른들이 시켜서 하는 거야, 네 뜻이야? . 말을 안 하는 건 어른들 뜻이라는 거야? 네 의지는 없고. 역시 말을 안 하고 손가락을 깍지 끼어 조물조물 거린다.
너 말 할 줄 몰라? 무슨 생각으로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는지 얘기 좀 들어보자고. 그럼아란이 물끄러미 말꼬리를 뺐다.
좀 앉아볼래요? 오빠 키가 커서 쳐다보기가 힘들어요. 그래, 좋아. 제후는 정장 재킷을 벗어 테이블에 던지고 아란과 약간 떨어져서, 나란히 침대 모서리에 앉 았다.
아란이 옆얼굴을 가리고 있던 생머리를 쥐어 귀 뒤로 넘겼다.
다시 묻자. 왜 나하고 결혼하겠다고 했어? 도망치고 싶어서요. 도망? 사실 우리 엄마 내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어요. 지금 계신 분은 새 엄마구요. 아, 그래? 너도 보통 배경은 아니란 말이지. 제후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 결혼도 새 엄마가 시킨 거에요. 내 뜻은 없었어요. 안 하면 되잖아. 본인들이 맘 없다는데 설마 억지로 떠밀기야 하겠어? 아뇨, 할 거에요. 아란이 고개를 틀어 제후를 쳐다봤다.
강 건너 불구경 남 얘기 하듯 대답을 던지던 제후도 담배를 잠시 입에서 떨어뜨렸다.
혼자 살 수 없고 그 누군가 보호란 명목으로 내 곁에 있어야 한다면 새 엄마와 나에겐 관 심도 없는 아빠보다는 남편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안 그러게 생겨가지곤 꽤 http://ash.shemijin.com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너. 제후는 손을 내밀어 손등으로 아란의 목덜미를 쓸었다.
하얗다, 눈이 부실 만큼. 말하자면 계약을 하자는 거야? 형식상의 부부 관계를 유지하되 상대가 무엇을 하든 상관 하지 않는? 네. 미안하지만 난 그럴 맘 없는데? 너에게는 내가 일종의 도피처에 불과할지 몰라도 난 할아 버지와 약속을 했거든.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통해 이 망나니 권 제후도 꽤 쓸만한 놈인 걸 보여드리겠다고. 그러자면 아이도 만들어야 할 거고 제후는 아란의 붉은 입술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촉촉한 윤기가 흐르는 그것에 탐이 났다.
그리고 난 그걸 아주 좋아해. 아이를 만들기 위한 작업



이상의 즐거움이 있으니까. 만일 네가 나와 끝까지 계약을 맺고 싶다면 그 정도는 허락해줘야겠어. 그녀는 망설였다.
그저 다른 여자를 만나는 정도의 자유를 허락해주면 제후가 감지덕지해서 자기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아란은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떡할 거야?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대신에 대신에? 내 곁에 끝까지 남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요? 오빠가 어떤 여자를 만나든 간섭하지 않 을 http://ucckor.co.kr 테니까 날 버리지는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제후는 아란의 입술과 턱을 만지던 손가락을 떼어냈다.
호박이 넝쿨 채 굴러 들어오겠다는 데 거절할 이유가 뭐 있겠어. 그래. 다음 행동은 거의 충동적이었다.
잔잔한 침묵 속에서 시선이 얽혀들고 뜨거운 향기가 제후 와 아란의 입술 사이에서 오가기 시작했다.
키스가 깊어지면서 제후는 한 팔로 아란의 허리를 감싸면서 침대로 눕혔다.
이후에 어떤 일 이 있어날지 알고 있을 텐데 아란은 열에 들뜬 남자를 제지하지 않았다.
아란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과 누워, 턱을 드는 바 람에 더욱 선명히 드러나는 목덜미는 보고만 있기엔 너무 매혹적이었다.
연노랑 니트가 가슴까지 밀려올라갔다.
부드럽고 말랑한 속살에 붉은 색 흔적을 남기며 예 비 신부의 몸 맛보기에 열중하던 제후는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의 벨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아씨! 한창 바쁜 데 누구야? 재킷을 뒤져 핸드폰을 꺼낸 제후가 전화를 받는 사이 발그레진 얼굴과 할딱이는 숨을 어쩌 지 못하고 일어난 아란이 구겨진 옷을 내리며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한다.
귀여웠다.
스무 살 나이에 걸맞게 발랄한 미니스커트 아래, W자 모양으로 벌려 앉은 그녀의 다리에 다시금 제후의 시선이 맴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나 보다.
매무새를 추스르다 눈이 마주치자 다른 쪽으로 피해버리는 아 란을 보고 제후는 웃음이 나왔다.
왠지 아란과 시작할 결혼생활에 기대가 생기고 있었다.
전화를 건 할아버지에게 아란을 데려가겠다는 말을 하고 제후는 폴더를 접어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아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자. 어어디로요?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리러 가야지. 우리 결혼한다고. 아란이 일어나더니 손을 내밀어 맡긴다.
그 수줍은 향기를 참지 못하고 제후는 아란을 가슴 에 안아본다.
동그랗고 작은 어깨 아래로 풋풋한 내음이 나는 여자의 몸이 제후의 팔 안에서 느껴진다.
잘 해줄게. 제후는 아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한테 온 거 후회 안 하도록 아껴줄게. 아란이 제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둘만의 살림을 시작할 집에서 제후와 아 란은 따스한 빛을 받으며 오래도록 그러고 서 있었다.
열어둔 발코니 문으로 바람을 타고 꽃향기가 올라왔다.
뭐라고? 결혼?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래서 카페의 창가 자리에 여자와 마주앉은 남자는 곧추 선 목 소리를 듣고도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야, 권 제후! 네가 들은 게 전부야. 그 이상은 할 말 없어.제후는 이 곳에 들어와 두 개째인 담배를 뭉개어 껐다.
말도 안 돼! 너 이제 겨우 스물넷이야. 멋대로 인생 즐기기에도 모자란 어린 남자 나이 스물넷이면 어린 아이가 아니지, 정 수경. 제후는 한심하다는 듯 그런 말을 꺼낸 수경을 쳐다보며 정정했다.
여느 머저리들하고 다르게 난 군대도 지원해서 다녀왔어. 거기서는 최소한 대원 그룹 후 계자가 아닌 평범한 남자 권 제후로 대접해줬고 덕분에 제법 심각한 인생 고민도 할 수 있었지. 돈, 시간, 여자 내게 즐길만한 것은 많지만 언제까지나 이러고 살 생각은 안 했어. 너네 고리타분한 할아버지가 시켰니? 새 담배에 불을 붙이던 제후의 손이 멈칫, 했다.
말조심해. 맞구나? 내 말이 맞지? 할아버지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거지? 넌 다른 건 몰라도 할아버 지 할머니 말씀은 잘 듣는 착한 손자였으니까. 그래서 눈 밖에 날까봐 마음에도 없는 결혼 한다고 한 거지? 아니. 미안하지만 네 말이 틀렸어. 예쁘고 착하지. 생긴 거랑 다르게 반응도 빨랐고.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린 제후의 입가에 짓 궂은 웃음이 올랐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눈에 거슬리는 건 사람이든 물건이든 절대 곁에 안 둬. 뭐, 집안끼리 우의를 다지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그 아이랑 결혼하겠다고 한 건 내가 원해서야. 그야 처음에는 어른들 뜻이었어도 직 접 만나보니 남 주기는 아깝더라고. 수경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도무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좋아하는 건 아니지? 정 수경. 네 눈에 그렇게 쓰여 있어. 놓치기 아까운 상대일 뿐이지 아직 마음을 허락한 것은 아니 라고. 수경도 맞담배를 피워들었다.
제후는 고즈넉한 눈길 속에서 담배를 피우는 수경을 잘라내고 달콤한 사과 향기가 날 것 같은 아란을 덧대어보고 있었다.
그 아인 담배 안 피워. 수경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너처럼 진한 향수 냄새가 풍기지도 않고 안고 있으면 연한 장미향이 나. 붉은 립스틱은 바를 줄도 모르고 진한 화장은 더더욱 거리가 멀지. 요컨대 나와는 정반대의 스타일이라서 끌렸다는 거야?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 정 수경은 곁에 있으면 자랑스럽지만 부담스러워. 그 아인 평범하 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워. 정 수경은 혼자 있어도 당당하지만 그 아이는 가냘프고 약해서 내가 보호해 줘야 해. 제후는 아란의 첫인상을 그렇게 읊어냈다.
동정에 약간의 호감에, 그게 사랑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도 사랑한 건 아니지. 완벽하게 즐겼을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 야. 말해봐, 정 수경 너와 나에게서 호텔과 섹스를 빼고 나면 뭐가 남는지. 제후는 계산서를 들고 일어섰다.
나 간다.
결혼식 날짜 잡히면 청첩장 보낼게. 카운터에서, 아무 대꾸도 없이 앉아 있는 수경을 돌아보는 제후의 속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여자를 즐기되, 마음은 주지 않는 얼음왕자 권 제후가 그래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었는데 이런 식으로 헤어진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싶었다.
대학 휴게실 카페를 나온 제후는 도서관 주차장으로 향했다.
알만한 사람 다 아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터라 지나는 학생들이 한 번씩은 그를 흘깃거리며 지나간다.
아마도 아란은 남자인 자기보다 더한 관심공세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아란 아란을 부르며 다가가려던 제후의 걸음이 멈춘다.
제후는 도서관 앞에서 또래의 남자와 이 야기를 하고 있는 아란을 발견했다.
남자가 뭐라고 얘기를 하자 아란은 주먹을 쥐고 가슴을 툭 치며 웃는다.
둘이 친한 사이인 지 남자는 아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은 아란. 설마 사귀는 사이는 아니겠지. 어쩐지 그 모습이 아니꼬운 제후였다.
은 아란! 배는 커진 목소리에 해맑은 미소는 제후에게로 향하고 아란이 끄덕 인사를 한다.
난 둘이서 기다리라고 한 기억 없는데. 제후는 뛰는 걸음으로 아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란이 남자에 대해 소개를 하기도 전에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어 팔을 감아 안고는 남자를 노려봤다.
이 아이하고 어떤 사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이상한 생각하면 가만 안 둬. 나랑 결혼 할 여자야. 오빠, 채석이는 조용히 해! 누가 너더러 말하랬어? 친구든 뭐든 어떤 놈도 너에게 손대는 거 허락 안 해! 네가 판 함정이야. 은 아란 넌 내 스스로 장난감이 되어주겠다고 했어. 그러니 날 원망할 생 각 마. 넌 내 거야. 이제부터는 권 제후의 아내이며 여자라고. 알아들어? 난폭한 입맞춤이 아란의 입술을 찾아왔다.
전번에 빌라에서 느꼈던 다정함과 배려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문득 가슴을 찌르는 죄책감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수경을 생각하면 그랬다.
사랑하는 사이 는 아니었다지만 언제고 질리면 떠날 시한부의 상대였다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면 소유욕 때문일까. 이제 갓 소녀티를 벗은 순결한 여인을 연모(戀慕)하는 마음일까. 아직 누구도 먹어보지 못한 이브의 열매에 손을 대려는 경쟁자를 물리치려는 치졸한 이기심일까. 그 어느 것이 이유이든 좋았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수경을 보냈으니 남은 건 빼앗기면 안 된다.
오빠. 핸들을 돌리는 거친 움직임을 보며 아란이 물었다.
아까 왜 그렇게 화났어요? 진짜 채석이 때문에 그래요? 그 녀석 이름 같은 건 알고 싶지 않아. 화난 이유를 알아야 풀어줄 거 아니에요. 신호대기에 들어간 틈을 타 제후는 아란을 쳐다봤다.
내 맘에 들어 뭐하게? 네? 우리 계약 조건에 하나를 추가하자는 거야. 잘 들어. 학교에 다니는 것도 좋고 친구를 사 귀는 것도 좋지만 누구하고도 연애는 금지야. 그런 걸 싫어? 아니요.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오빠를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오빠 말대로 할 게요. 대원 그룹 계열사의 호텔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란의 부모님을 모시고 양가 상견례를 하 는 동안 내내 그의 눈치를 살피는 아란을 보며 제후는 열 번도 넘게 학교에서의 행동에 후회를 했다.
편안한 청바지와 티셔츠 대신 단정한 원피스를 입고 어른들의 무관심에 묻힌 아란은 무척이 나 위태하게 느껴졌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뽐내는 새엄마와 눈길이 마주치면 얼른 고개를 숙여버리곤 했다.
누가 건들면 큰 눈으로 울음을 터트리며 품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도무지 무신경하게 그녀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괜찮아? 결국 혼자 떨어져 바람을 쐬러 나온 아란을 따라 나온 제후였다.
인기척에 흠칫, 숨을 멈췄 던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감싼 사람이 제후라는 걸 알고는 가슴에 손을 올려놓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네. 언제 들어도 다소곳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오빠는 왜 나왔어요? 네가 오랫동안 안 보이길래 찾으러 나왔지. 명색 부모라는 사람들은 몰랐어도 처음 아란이 머리가 아프다며 홀을 빠져나갈 때부터 보고 있었던 제후였다.
나 걱정 돼서요? 뭐, 그렇게 생각해서 기분이 나아진다면 네 마음대로 해. 제후는 아란의 물음에 쑥스러움을 느꼈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 정말 부부가 되긴 하나 봐요. 동문서답이었다.
응? 사랑이 없는 결혼도 가능하다는 거 오늘 처음 알았어요. 그럼 정말 재수가 없었겠군. 사랑하지도 않는데 가뜩이나 신랑이라고 걸린 놈이 권 제후 라서 말야. 난 오빠에 대해서 잘 몰라요. 그러니 오빠 자신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요. 사람들이 권 제후에 갖는 편견으로 우리 결혼 시작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냥 내 눈에 비친 오빠 모습을 믿고 싶어 요. 퍽듣기 좋은 말인데. 살다보니 이런 날도 다 있군. 남한테 칭찬을 받을 때도 있고. 파르르 떠는 아란의 어깨에 제후는 재킷을 벗어 걸쳐주었다.
아란아.경계심이 사라진 말투였다.
나 오늘 좋아하는 사람이랑 헤어졌다.
그래서 너한 테 성질 부렸어. 미미안해요.아란의 얼굴에 실망한 듯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오빠 저 때문에 수경 언니랑 헤어진 거에요? 그런 거에요? 그리고 뒤이은 당혹감. 아란이 두 손을 들어 입을 막자 제후가 아란의 얼굴 가까이 자기 얼굴을 들여다 대며 물었 다.
너 수경이 알아? 그러니까오빠 여자친구라서 알았어요. 오빤 우리 과에서 유명한 사람이고좋아하는 애 들도 많고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에 아란의 얼굴이 빨개진다.
제후가 짓궂게 캐물었다.
애들이 날 좋아한다고? 나 같은 망나니를? 그야 좋아하는데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입술을 오물오물 오므려 붙이는 모양새가 참 고왔다.
내가 나쁜 놈이라서 착한 아이에게 눈 이 가는 걸까? 이 아이는 내가 나쁜 남자라서 그냥 끌려오는 걸까? 그럼 너도 나 좋아해? 갑자기 튀어 나온 말이었다.
눈에 띠게 동그래지는 아란의 눈을 보며 이번엔 제후가 당황했 다.
미친 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한테 아아니, 그냥 해 본 말이야. 애들이 나 좋아한다기에 너도 혹시나 아란이 여기 있었니? 단아한 여자의 음성이 제후의 말 사이에 끼어들었다.
문득 창백해지는 아란의 낯을 본 제후 가 고개를 돌렸다.
스무 살의 딸을 뒀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젊은 새 어머니 나현이었다.
회장님 내외분이랑 얘기를 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사람들이 보이질 않지 뭐야. 제후군이 같이 있었다니 안심이지만 앞으로는 혼자서 돌아다니지 말아라. 아란인, 제가 데리고 나왔는데요. 단 둘이 있고 싶어서요. 아란이 나현을 보지 못하게 앞을 가로막으면서 제후가 말했다.
생각지 못한 반격을 받은 그 녀의 얼굴이 일순 파래졌다가 곧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머, 그래요? 제후군, 우리 아란이 만난지도 얼마 안 됐는데 언제 그렇게 정이 들었을까. 내 생각에는 둘이 천생연분이 아닐까 싶어.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그렇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다정해보이시거든요. 고마워요. 그이가 들으면 좋아하겠네. 분명한 조소를 흘리며 나현이 돌아서 들어갔다.
밤공기가 차니 너무 오래 있지는 말라는 당 부와 함께. 괜찮아? 한숨을 쉬며 제후는 아란을 돌아봤다.
눈물, 사슴처럼 맑고 투명한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난 저 여자 싫어요. 그리고 엄마 돌아가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저 여잘 데려온 아빠 도 왜 이 아이는 나를 붙잡을 말들만 하는 걸까. 그러나 제후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아란이 마음껏 울 수 있도록 넓은 가슴과 찬 공기로부터 그녀를 감싸줄 두 팔을 빌려주었을 뿐이었다.
그의 어깨가 천천히 젖어왔다.
스무 살의 신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재벌끼리의 정략결혼이라는 특종을 잡기 위해 몰려든 기자들도 신부 대기실에서 식이 올려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란의 모습에 넋을 잃고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과 긴장으로 상기된 볼, 잔잔히 내리 깔은 긴 속눈썹과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 뜨릴 듯 젖어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 붉고 도톰한 입술, 하나로 올려 우아하게 드러난 목선과 탐스러운 사과 같은 가슴. 한없이 가냘퍼서 남자들의 보호의식을 자극하는 여성스러움. 국내 최고 디자이너의 손길에서 탄생한 하얀 웨딩드레스는 돌아가신 친어머니로부터 물려받 은 아란의 미모를 한층 빛나게 해주었다.
숨 죽여 감탄할 아름다움이, 필히 그 앞에 무릎을 꿇어 장미꽃다발을 바치며 사랑 을 맹세하고픈 사랑스러움이 그녀에게서 풍겨 나왔다.
식장 입구에서 하객들을 맞고 있던 제후는 부모님을 대신한 작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나머 지를 부탁하고는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남들 눈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보고 싶어 안달이 난 신랑처럼 보일 거라는 생각에 제후는 조소가 나왔다.
양가 상견례를 마치고 고작 일주일이 지난 후의 결혼식이었다.
돈만 있으면 무엇도 부릴 수 있다고 하더니 언제들 저렇게 연락을 받고 왔는지 넓은 홀을 꽉 채운 하객들과 풍성한 피로연 음식들이 믿기지 않았다.
물론 가장 믿기지 않는 건 검은 색 턱시도를 입고 아란에게로 가고 있는 제후 자신이었다.
제후는 노크 없이 신부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그녀처럼 어린 친구들에게 둘러 싸여 http://akc.mainucc.me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아란이 남자의 구둣발 소리에 시선을 돌린다.
오빠. 같은 과 선배이며 이제는 친구의 남편이 된 남자를 쳐다보던 아이들이 제후에게 목례를 건 네고 자리를 피해 나가주었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기를 기다렸다가 제후는 아란에게 다가갔다.
좋아 보인다.
잠은 잘 잤어? 제후의 심장이 반가움으로 두근, 뛰었다.
그럭저럭요. 이 밤이 지나면 새 엄마 얼굴을 다시 안 봐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 해서요. 그랬어? 푹신하고 두터운 천이 깔린 의자에 아란과 나란히 앉은 제후는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포를 살며시 걷어 올리고 입술에 키스했다.
한 입 베어 먹고 싶은 딸기향이 났다.
다른 건 몰라도 아란의 입술만큼은 그냥 보 고 넘어갈 수 없었다.
이따가 실수하지 말고 잘 하자, 우리. 네. 전 오빠만 있으면 아무 것도 무섭지 않아요. 아란이 웃었다.
이 날 정오에 시작한 예식은 피로연을 포함해 한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웨딩 카에 몸을 싣고 신접살림을 날 빌라로 향하는 동안, 아란은 제후의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이 들어있었다.
아가씨가 피곤하셨나 봐요, 도련님. 핸들을 잡은 박 기사는 대원 그룹의 모체인 (주)대원 전자가 세워질 때부터 수십 년을 권 회장의 출 퇴근을 맡아 온 사람이었다.
아무나 곁에 두지 않는 권 회장에게 신뢰 받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의 손을 빌려주신 걸 보면 할아버지가 이 결혼에 대해 얼마나 기대를 하고 계시는 지 제후도 알 수 있었다.
내 친구 놈들이 웬만큼 짓궂어야 말이지. 아저씨도 보셨죠? 우리 아란이한테 하는 거. 우리 아란이. 그 말에 박기사가 사람 좋고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장단을 맞춘다.
아란 아가씨가 도련님 마음에 단단히 드셨나 봐요? 귀엽잖아요, 애기 같고. 제후는 이마에서부터 헝클어진 아란의 긴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러자 잠결에 응응거리던 아 란이 제후에게 안겨오며 팔을 뻗었고 제후는 잠시 박 기사의 눈치를 보다 그녀를 안아주었다.
저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도련님. 부부간에 내외해서 쓰나요. 나이 지긋한 박 기사가 백미러에 비치는 다정스런 광경에 다시금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래지 않아 빌라에 도착했다.
그 때까지도 잠에서 깨지 않은 아란을 업고 올라간 제후를 대신해 박 기사가 몇 안 되는 짐을 들어다 주었다.
종종 뵙겠습니다.
잘 사세요, 제후 도련님. 수고하셨어요, 아저씨. 기척이 사라지자 현관의 센서등도 자동으로 꺼졌다.
일차로 아란을 침대에 눕혀놓고 제후는 온종일 목을 죄고 있던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차분히 상황정리를 해보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둘만의 생활이 시작됐다.
여자라기보다는 아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녀, 은 아 란과 함께. 효도를 한답시고 할아버지 말씀을 따르긴 했는데 자신이 없었다.
제후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도 없는 거지. 제후는 깊은 잠에 든 아란의 몸을 감상하며 훑어보 았다.
은 아란(阿蘭). 이 결혼은 어디를 보나 나에게 유익인 계약이었어. 내가 원하면 무상으로 즐길 수 있는 여 자의 몸과 독립의 자유가 대가로 주어졌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해. 날 이 곳까지 오게 만들었고 널 지켜줘야 할 이유는. 제후는 아란의 몸을 반듯하게 돌려 눕히고는 스커트 속으로 손을 넣어 스타킹을 벗겨냈다.
불편해 보여서가 아니라 그 때 하다만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제후의 손가락이 움직이면서 한 꺼풀씩 아란의 몸에서 옷이 사라졌다.
그녀의 블라우스와 플레어스커트 위로 제후가 입고 있던 실크 셔츠와 정장 바지가 그 위로 겹쳐서 떨어졌다.
일어나. 제후는 아란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일어나. 이대로 잠이 들면 어떻게 해? 오빠? 눈을 뜬 아란이 서늘해진 자신의 몸을 보며 놀라더니 시트를 끌어당겨 가리려고 했다.
제후 가 재빨리 아란의 손에서 시트를 빼앗아 저만큼 내던지고는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오늘 우리의 첫날밤이야. 나더러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밤을 새라는 거야? 제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아란의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피로연에서 제후의 친구들이 건넨 폭탄주를 마시고 난 때처럼. 그게 아니라 난 왜, 싫어? 그 땐 좋아했잖아. 저저기 씻고 나오면 안 돼요? 그 다음에 하면 싫은데. 난 지금도 널 먹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고. 귀여웠다.
제후는 씨익 웃으며 일어나려는 아란의 어깨를 눌렀다.
도무지 아란에게는 다른 여자들에게 한 것처럼 냉정할 수가 없다.
마치 어린 여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말투가 누그러든다.
겁먹지 마. 제후는 아란의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야 처음이니까 아프겠지만 적어도 하고 나서 안 할 걸 그랬다는 말은 안 나오게 할 거 니까. 아란이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제후는 마주 미소지어주면서 그녀를 감추고 있던 마지막 옷 들을 끌어내렸다.
처음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해버린 남자였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재벌가의 손자, 입맛대로 여자를 갈아 치우는 바람둥이에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안하무인의 성격과 행동들. 그래도 아란은 제후를 사랑했다.
먼 바라봄만으로도 맹목적인 사랑에 빠져버렸다.
제후가 어떤 사람인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래서 어른들의 사업상 합의에 불과한 제후와의 결혼에 일언반구의 반론도 없이 동의했다.
형식뿐인 결혼에 허울 좋은 아내였지만 제후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아란은 그것으로 바랄 것이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제후가 자신을 돌아보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정략결혼으로 맺 어진데다 성숙한 여자의 아름다움은 찾을 수 없는 평범한‘여자아이’에게 관심을 갖게 하려면. 아란은 고민하다 계약이란 말을 꺼냈다.
무엇이든 오빠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고 다른 여자를 만나도 간섭하지 않겠다고. 대신 에 다만 나를 버리지만 말아달라고. 사랑까지는 힘들겠지만 가끔은 오늘처럼 나를 안아주겠다고. 난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늘 먼 곳에서 바라만 보던 사람을 내 곁에서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큼 난 오빠 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거짓말 때문에 오늘부터 심장이 감수해야할 아픔은 전보다 더 크고 견디기 힘든 것이 됐지 만 눈을 뜨면 곁에 있는 그 사람을 보며 상처도 잊을 거라고 아란은 생각했다.
마음으로 원하는 사람. 그리고 내 몸 만을 원하는 사람. 마침내 제후와 하나가 되는 순간.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불기둥을 느끼며 아란 은 까마득히 멀어지는 의식 속으로 희망을 가져보았다.
언젠가는 이 사람도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작은 기대를 아란아. 그만의 쾌락에 몰두해 있던 제후가 격렬한 몸짓을 멈추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아 란의 눈가에 흩어지는 눈물을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달래주었다.
많이 아프니?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군 거야? 아니. 아니에요. 근데 왜 울어. 나 미안하게. 미안해하지 말아요. 나 오빠 사랑해요. 지금 이 시간이 믿기지 않도록 고마워서 그러는 거에요. 정말 괜찮아요. 처음 겪는 일이라 겁이 많이 났었나 봐요.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에요. 아란은 눈을 감아 눈물을 떨구면서 두 팔로 제후의 목을 가까이 끌어안았다.
천천히 사랑하 는 남자의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그에게 안긴 지금을 기억하고 싶었다.
아란은 계속하라는 듯 손가락으로 제후의 숱 많은 머 리칼을 헤집으며 넓은 등을 쓰다듬었다.
이대로도 좋아요. 나를 바라보는 마음이 사랑이 아니어도 좋아요. 왜냐하면 내가 그 만큼 더 오빠를 사랑하면 되니까요. 슬프지만 지금 나 행복하니까요. 어린 애랑 사니까 좋냐? 결혼하고 제후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었다.
가장야한사진 요새 스무 살이면 어린애 아냐, 임마. 본인은 가만있는데 친구 두 놈이 남의 아내를 놓고 말을 나눈다.
그런가? 내가 아는 여자애 하나가 제후네 와이프랑 동갑인데, 남자경험이 백은 넘는다더 라. 열다섯 때부터 익힌 테크닉이 장난이 아니라지, 아마. 히죽,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말꼬리를 늘인 서훈이 제후를 쳐다본다.
제후는 표정 변화 없이 담배만 입에 문다.
남의 부부사, 뭐 그리 캐려 들어? 니 놈이 그건 알아 뭐하게? 혹시 욕구불만은 아닌가 해서. 경영학과 은 아란 유명했잖아. 순결반지 끼고 다니는 걸 로. 서훈의 말처럼 아란은 일명 http://naei.net 족이었다.
원하는 건 뭐든지 누릴 수 있는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사람들의 추어올림에 넘어가 방 탕한 놀음에 빠지기 쉬운 외모를 가진 그녀였지만 남자들의 숱한 추근거림 한 번 허락한 적 없는 여자였다.
심지어 결혼 전까지 순결을 지킨다는 맹세의 표시로 반지까지 끼고 다녀, 학교에선 시대의 희귀종으로 통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런 여자 데리고 살 재미가 나냔 말이지. 너 혹시 욕구불만으로 시달리는 건 아닌가 해 서. 야, 처녀도 처음에만 좋지 나중에는 재미없다.
여자란 모름지기 침대에서의 테크닉이 좋아야 야, 권 제후 너 어디 가? 말을 듣다 말고 일어서는 제후를 따라 서훈이 고개를 비틀어 올린다.
제후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두 친구들을 돌아봤다.
니들이랑 같이 놀다간 내 수준까지 고공하락 할 것 같아서 간다.
수준 낮은 놈들끼리 잘 들 놀아라. 사선으로 매는 가방의 위치를 바로잡더니 제후는 두 손을 몸에 달라붙는 질감의 바지 주머 니에 찔러 넣고선 휘적휘적 사라져버렸다.
다리가 길어 움직이는 것도 빨랐다.
야, 권 제후! 냅 둬. 저 놈 걷는 거 보면 모르겠냐? 민준이 서훈의 어깨를 툭툭 쳤다.
모름지기 신혼에 남자 걸음이 똑바르면, 파트너랑 문제가 있다는 거야. 나라면 일주일은 침대에서 안 내려온다.
귀 뒤 켠으로 친구 놈 둘이 장단 맞춰서 떠드는 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흐드러진 벚꽃길을 걸어가는 제후의 얼굴에는 이른 나이에 유부남이 된 억울함도 욕구불만으로 인한 찡그림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새끼들. 그렇게 궁금하면 지들도 결혼해 보라지. 제후는 피식, 입가를 올렸다.
그야 완벽하게 만족시킨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침대에서의 아란은 뜨겁고 싱그러웠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라서 흡수가 빨랐다.
제후가 가르치는 대로 곧잘 따라와 주었다.
먼저 원하는 쪽은 언제나 제후였고 아란이 안아달라고 조르는 경우는 없었다.
그녀는 남편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건 엄두도 못 냈을 뿐더러 남자의 벗은 상체만 봐도 양 볼에 배시시 붉은 물이 드는 여자였다.
마음에 안 드는 여자를 가리켜서 남자들은 귀엽다고 하지만 아란은 정말 귀여웠다.
아침에 부스스 눈을 뜨고 일어나 무방비 상태로 바라볼 때, 등 뒤로 다가와 가만히 그의 허리를 감싸며 등에 머리를 기댈 때그 가 식 없는 수줍음에 제후는 어느새 마음을 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사실 제후는 아란과 사는 게 불편할 줄 알았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본가에서 지낼 때도 특 별한 용무가 없으면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고 남이 들어오지도 못하게 할 만큼, 혼자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아마도 그녀에게 익숙해지는 모양이었다.
1학년이라 수업이 많지 않아 제후보다 늘 일찍 집에 돌아오는 아란의 신발이 현관에서 보이 지 않으면 제후는 서운한 기분부터 들었다.
오빠. 미진과 승원이라고 했던가. 강의를 듣고 나오던 아란이 제후를 보더니 단짝 친구 둘에게 먼 저 간다는 인사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오늘 오빠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늦게 돌아온다면서요. 취소했어. 제후는 그를 향해 목례를 하는 미진과 승원에게 고개를 까딱해주고는 아란의 손을 잡았다.
작고 가느다랗다.
왜요? 너랑 같이 놀려고.제후는 되묻는 아란의 깜찍한 입술에 입술을 쪽 맞추며 말했다.
손잡 고 거리도 걷고 쇼핑도 하고 배고프면 저녁도 먹으러 가고 술도 마시고. 둘이서만요? 아란이 망설였다.
어차피 계약 커플에 불과한데 내가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건가? 그런 생 각이 들자 제후는 기분이 상하려고 했다.
싫어? 아뇨, 좋아요. 정말루요. 내가 보기엔 영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싫으면 관두고. 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벤치에 길게 팔을 뻗치고 앉았다.
아란이 죄 지은 사람처럼 겁에 질려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서서 물었다.
화화났어요? 그래. 내가 어떻게 하면 화 풀 거에요? 몰라. 제후는 코웃음을 치곤 시선을 딴 데로 돌려버린다.
착한 아내라도 되어 보겠다는 걸까? 왜 그녀는 내 앞에서 자기 의지는 없는 사람처럼 내 비위를 맞추려 하는 걸까? 행여 계약이 깨져서 자신을 버리는 일이 생길까봐? 단지 그것이 두려워서? 오 제후야. 아란이 입을 열었을 때 그녀보다 행동이 빠른 여자의 목소리가 잘라버렸다.
아란과 제후, 두 사람 모두 그게 누구의 목소린지 알고 있었다.
아, 미안. 내가 방해한 거였어? 키가 크고 늘씬한 몸매, 더할 나위 없이 섹시한 외모의 여자가 그들에게 다가오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안녕, 우리 가끔 봤지? 수경은 아란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아란이 불안함으로 덜컥 덜컥대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었지만 예의상 고개를 까딱해서 인사를 받았다.
웬일이야? 제후가 일어나서 수경과 눈을 맞췄다.
어떤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어도 제후의 얼굴이 아니 라 등을 보고 있는 아란에게는 그녀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웬일은. 그냥 지나가다 너 있는 거 보고 온 거지. 할 말 있으면 다른 데 가서 하자. 왜, 부인이 들어선 안 될 말 할까봐 걱정 돼서? 걱정은 진짜 좋아하는 사람에게나 하는 거지. 유감스럽게도 저 애하고 나, 그런 감상이나 주고받을 정도로 복잡한 관계는 아니거든. 제후가 아란을 힐긋 쳐다보더니 수경의 손목을 잡고 가버린다.
비웃음을 지우지 않은 낯으 로 수경도 아란을 뒤돌아보고 그에게 이끌려간다.
알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오빠 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거 확인시켜 주지 않아도 다 안다구요. 그래 도 화부터 낼 필요 없었잖아요. 조금만 기다렸다가 내 얘기 들어줄 수 있었잖아요. 단 둘이 시간을 보내자는 오빠 말에 머뭇거린 건 싫어서가 아니라 당황해서 그랬어요. 오빠 와 내가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고는 있지만 오래전부터 바라던 내 작은 소원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질 거라곤 생각도 못 해봤으 니까요. 그래요. 내가 만든 거짓말이니 책임도 내가 져야 하겠죠. 오빠를 원망하지 않을 게요. 다만 오늘처럼 날 너무 슬프게는 하지 마요. 사랑이 아니어도 좋다고 자신조차 속여 버린 나지만 가능하다면 그 벌은 오빠가 없는 곳에서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 벌을 주는 사람도 오빠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화내는 오빠 얼굴 보면 무조건 미안하고 슬퍼지니까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꾹 눌러 참은 아란이었다.
너 대체 뭐하자는 거야? 아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와서 제후는 수경의 손목을 뿌리쳤다.
권 제후, 억지부리지마. 내가 여기로 데려다달라고 부탁했어? 수경은 손목을 주무르며 흥흥, 콧소리를 냈다.
난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가려던 거였다고. 근데 네가 끌고 온 거지. 아니, 솔직히 말해 도망 온 거지. 행여나 옛 여자와 있었던 추잡스런 과거가 밝혀질까 봐. 정곡을 찔린 제후는 입을 다물었다.
벌써부터 눈치 볼 만큼 아내한테 빠진 거야? 말했잖아. 그 애하고 나 감상이나 주고받을 복잡한 관계는 아니라고. 변명이지? 정 수경! 너 자꾸 말도 안 되는 얘기로 나 귀찮게 굴래? 너 지금 찔러보는 말마다 반응한다는 거 알아? 수경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깊이 빨아들였다가 하얀 연기를 내뿜기를 수차례 기다림과 의문에 지친 제후가 입을 열려는 찰나 수경이 꼬리를 이었다.
또 있어. 처음에 나한테 그 애 얘기 꺼내면서 헤어지자고 했을 때랑은 눈빛이 달라. 그 땐 동정과 약간의 호감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진지해. 진지하다고? 인간 대 인간으로 관심이 있다는 거야. 권 제후 넌 여자들의 몸과 심리를 읽는 데는 선수 지만 정작 네 것을 돌아보는 것엔 서툴러. 그래서 그 날 내가 널 붙잡지 않은 거야. 자기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 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 아이가 날 변화시켰다? 아니면 아니라고 해. 제후는 수경의 얘기가 얼마만큼이나 가능성이 있는가를 생각해봤다.
은 아란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



물론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단순히 보호의식 때문이다.
아란이 결혼 계 약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것. 새 어머니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그리고 또 다른 조건. 결혼 생활 중에 어떤 여자를 만나도 좋지만 마지막은 자신으로 해달라던 부탁. 하지만 이상 하게도 공식적으로 바람피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는 제후였다.
의식만 하지 못했을뿐 아란과 같이 있을 때에도, 그녀와 떨어져 있을 때에도 아란의 생각만 하는 제후였다.
내 말이 맞는 거지? 수경이 재차 물었다.
너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그러니 일일이 내 마음 캐려고 들지 마. 앞으론 만나도 아는 척 하지 말고. 한참을 깊은 생각 속에 빠져 있던 제후였지만 늘 그렇듯 표정을 감춘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내 다른 화제로, 수경과의 대화를 맺고는 왔던 곳을 되돌아 뛰어가기 시작했다.
바보 제후의 뒷모습이 멀어지도록 쳐다보고 있던 수경은 혼자 남겨진 호숫가 벤치에 그대로 주저 앉았다.
나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바보야, 이미 네 머릿속에 계약 같은 건 없어. 왔어요? 오늘도 저 말이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똑같은 말과 표정으로 현관에서 아란은 제후를 맞 았다.
마주 앉아 저녁을 먹지만 일체의 다른 말은 없었다.
먼저 밥그릇을 비워 일어나면 양치질을 하고 나와 그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설거지를 하고 드라마를 보려고 TV를 켠다.
아란아. 왜요? 자신을 닮아버린 무표정함에 신경 쓰였다.
아니, 간혹 슬픈 떨림이 멀리 떨어진 그녀의 어깨 에서 느껴지지만 제후는 차마 그 이유가 뭔지 묻지 않는다.
뭐 시킬 거 있어요? 다만 그 날 이후 확연히 달라진 행동에서 아란의 웃는 얼굴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새삼 깨달을 따름이었다.
그런 건 아닌데너 안 잘 거야? 벌써 11시잖아. 아란은 시계를 한 번 쳐다보더니 리모콘을 손에 쥐었다.
오빠 피곤하면 들어가요. 난 이거, 마저 보고 잘게요. 커피를 마셔서 그런지 잠이 안 오네 요. 마지못해 대꾸를 해 준 아란의 눈동자는 드라마 속에 묻혀 버린다.
웃고는 있는데 인형 같다.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살아서 숨을 쉬어서도 안 되는 인형을 바 라보고 있는 기분이다.
먼저 침대에 누운 제후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본인이 보는 앞에서 다른 여자를 데리고 사라져버린 일에 관해 아란은 이렇다 할 말은 안 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제후는 그녀를 볼 때마다 마음이 꺼림칙 했다.
걱정은 진짜 좋아하는 사람에게나 하는 거지. 유감스럽게도 저 애하고 나, 그런 감상이나 주고받을 정도로 복잡한 관계는 아니거든. 그를 쳐다보던 그녀의 눈동자도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왜 그런 말을 하냐는 듯, 누구를 위해 그런 말을 하며 뭘 확인하고 싶었냐는 듯 한없는 절 망과 아픔이 눈물로 고여 떨어질 것 같은 눈동자가 하나님 맙소사! 설마 저 아이가 나를? 제후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느긋하게 뒹굴거리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 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계약이라는 말을 먼저 입에 올린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아이였잖아. 벽을 만들고 경계를 했던 건 권 제후가 아니라 은 아란이었다고. 제후는 복잡한 머리를 감은 눈 속에서 견디다 못해 손을 집어넣고 마구 헝클어트렸다.
아무 래도 숙면을 취하기는 그른 것 같다.
결국 방에 들어간 지 20분 만에 제후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우유나 데워 마실까 냉장고로 걸음을 옮기다가 시선을 돌려보니 TV가 봐주는 사람 없이 저 혼자 떠들고 있었다.
아란은 잠이 들어있었다.
추웠는지 소파에서 몸을 웅크리고 조금만 움직이면 떨어뜨릴 자세 로 리모콘을 손에 쥔 채 말이다.
요 근래 그를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면 괘씸했지만 보살핌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몸을 웅크려 붙인 그녀에게선 안쓰러움마저 느껴졌다.
자세도 영 불편해 보였다.
난방도 안 되는 거실에서 저러고 자다가 행여 감기라도 걸리는 게 아닌가 제후는 걱정이 됐다.
이럴 거면 드라마 본다는 얘기는 뭐하러 한 거야? 제후는 아란의 손에서 리모콘을 빼내어 전원을 끄고, 그녀의 등과 무릎 밑으로 팔을 넣어 안아 올렸다.
애기처럼 삐지기나 하고 말야. 평소에 눈 뜨고 있을 때는 절대 하지 않는, 절대 권 제후답지 않은 말투와 표정으로 화를 내면서 제후는 어린 아내를 안고 침실로 들어가 눕혔다.
은 아란. 넌 꼭 말로 해야만 아냐? 그거 알아? 넌 안 그러게 생겨가지고 사람 마음을 참 혼란스럽게 만들어. 여전히 탐스러운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추고 제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아란 의 몸을 안고 눈을 감으며 잠을 청했다.
새벽에 안개가 끼는가 싶더니 며칠 꾸깃꾸깃 했던 하늘이 맑아지면서 모처럼 해가 나왔다.
놀기에도, 시험을 치르기에도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야~죽순이! 개방형 도서관에서 용케 자리를 잡고 공부를 하고 있던 아란이 미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두리번거렸다.
야야, 은 죽순! 나 여기 있어. 언제 왔는지 모르게 미진이 아란의 등을 찰싹 때리며 옆에 앉는다.
찢어진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 입는 옷도 하는 짓도 사내 아이 같은 친구였다.
자꾸 죽순, 죽순 그럴래? 사람 낯 뜨겁게. 친구 별명도 맘대로 못 부르냐. 왜, 빠순이로 불러줄까? 그 잘나빠진 서방님 들으실까봐 걱정돼? 알아봤자 달라질 것도 없어. 아란이 풀 죽은 표정이 되더니 여태 까맣게 연습장을 채워가고 있던 볼펜을 놓고 한숨을 쉰 다.
미진은 단짝 트리오 승원과 더불어, 아란의 제후에 대한 사랑을 알고 있는 나머지 하나의 친구였다.
‘죽순이’도 아란 이 죽고 못 사는 사람이 권 제후라고 해서 미진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너 니 서방님이란 무슨 문제 있냐? . 쯧쯧쯧. 뭐 표정 보아하니 안 물어봐도 알겠다만 그렇다고 이렇게 쭈그러져 있으면 어떡 해? 일어나라, 이 언니가 커피 한 잔 쏠게. 미진이 혀를 차더니 아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아란은 굳이 거절하지 않고 친구의 뒤를 따라 나와 자판기가 있는 곳까지 왔다.
침대에서 널 거부하던? 다짜고짜 묻는 미진 때문에 아란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냐. 그럼 테크닉 부족하다고 어디 가서 더 배워오라던? 아니지, 유부녀가 딴 놈한테 가서 배 워오면 불륜이 되는 건가? 야, 도대체 뭐가 문젠데? 아란은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을 꺼냈다.
그게 있지, 오빠가 예전에 사귀던 여자가 있었는데 여자가 있다고? 그럼 그렇지! 권 제후 그 바람둥이 자식 너랑 결혼한다고 할 때부터 알아 봤어. 아내는 아내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데리고 즐기겠다, 이거 아냐? 미미진아, 소리 좀당황한 아란이 입술에 손을 갖다댄다.
야, 이런 건 세상에 까발려서



망신을 당하게 해줘야 되는 거야. 결혼을 하기로 했으면 그 만이지 어디 옛날 여자친구랑 바람을 피워, 바람을? 그래서 어떡할 건데? 어떡하긴! 니 눈앞에 데리고 와서 두 년 놈들을 그냥 요절을 갑자기 싸하게 가라앉는 친구의 표정에 미진이 입을 다물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걸 두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아하하, 선배 그러니까 지금 제가 한 말은 말해봐. 요절 낸 다음에는 어떡할 건지.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얼버무리는 미진에게, 제후는 담배연기를 멋들어지게 내뿜으 며 걸어왔다.
왜 말을 안 해? 설마 뒤에서 듣고 있을 줄 누가 알았나. 미진은 방정맞은 입을 원망하며 속으로 열두 번도 더 후회를 했다.
이래서 남의 연애에는 끼어드는 게 아니라니까. 죄송합니다, 그게요 아란아, 내일 보자! 나도 시험공부 하러 가야지. 슬슬 제후의 눈치를 보던 미진은 뒷걸음질을 치다 후다닥 튀어 달아났다.
미진 의리 없는 친구는 관두고 은 아란, 나하고 얘기 좀 하자. 미진을 따라가려는 아란을 가로막으며 제후는 팔을 내밀었다.
더 이상의 회피는 http://yahaha.kbsyo.com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따라와.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오빠, 나요 따라오라고 했다.
기절시켜서 안고 가기 전에 내 말 들어. 협박으로만 끝날 것 같지 않은 눈빛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잠시 제후와 시선을 섞은 아란은 그를 따라 사람이 없는 비상구로 나갔다.
너 언제까지 이럴 거야? 내가 뭘꺄아앗!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후는 아란의 팔을 붙잡아 벽에 밀어다 붙이고는 반동으로 튀어 나오 려는 그녀의 몸을 그의 몸으로 가로막듯 눌렀다.
왜왜 이래요? 할딱이는 숨소리가 제후의 입술까지 와서 닿았다.
아란의 치켜 뜬 눈동자에 반항의 빛이 떠 오르는 것을 보고 며칠째 그녀를 안지 못해 주려 있던 수컷의 충동이 고개를 쳐들려고 했다.
집에서의 얘기는 집에서 끝내란 말야. 밖까지 끌고나오지 말고. 난 얘기한 적 없어요. 미진이가 멋대로 짐작하고 얘기한 거지. 눌려서 꼼짝도 않는 몸을 빼내려고 아란은 이리저리 비틀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반항을 하 는 그녀에게 제후는 새삼 호기심이 생겼다.
궁금하지? 제후가 말을 내던졌다.
그 날 수경이하고 사라져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집에 늦게 들어왔는지. 그런 건 왜 묻는 거야. 내 심장을 찢어놓는 걸로는 부족해서?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아란은 목이 메는 걸 참고 간신히 대답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아요.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 시간을 보냈는데 아무 관심도 없단 말야? 이런 말을 하면 아란이 상처받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제후의 예상대로 아란의 눈동자는 서 서히 붉은 빛으로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계약내용을 잊고 있는 거 아니에요? 우리 사이에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다고 한 사람은 오빠잖아요. 은 아란. 제후의 얼굴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네 말이 맞아. 그리고 그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야. 그게 뭔데요? 아란은 그 다음에 나올 말이 두려웠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물었다.
나에게 넌 욕구 배출을 위한 도구라는 사실 말이야. 사랑 없는 섹스의 상대이며 길들여야 할 어린 애에 불과하다는. 심장에 꽂혀 있던 비수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우르르 피가 몰려나왔다.
아란은 후들대는 무 릎에 억지로 힘을 주어 버텼다.
침착해, 아란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놀래. 나는 이 사람에게 아무 의미도 될 수 없다는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알고 시작한 일이었잖아. 하지만 지금은 저 눈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 한없이 다정하다가도 어느 순간 기대에 부푼 가슴을 잔인하게 눌러 터트리는 이 남자의 눈 을 마주할 자신이 내게는 없어. 아란은 주먹을 쥐고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아 말했다.
할 말 다 했으면 가도 되죠? 아란은 몸을 옆으로 비껴 비상구를 나갔다.
한 점 흔들림도, 매어 달림도 없는 시시한 반응 이었다.
낮은 굽의 구두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다가 급한 달음질 소리로 바뀌었다.
그녀가 멀어진다.
쿡쿡나 지금 대체 뭐하는 거야. 벽에 기대고 섰던 제후는 시니컬한 웃음소리를 내며 주저앉듯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울고 있을 아란의 모습이 현실처럼 눈앞에 어른거렸다.
권 제후 너 나중에 배우하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따 놓은 당상이겠다, 그렇지? 넌 겁쟁이야. 중간고사가 끝나고 내주 수요일에 있는 MT에 관한 공고가 붙었다.
대략, 취업 준비로 바쁜 4학년들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모두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너 갈 거냐? 귀찮게 뭐하러. 돈 내버리고 몸 버리고. 아란이가 간다면 갈 거지? 제후는 걸음을 멈추고 민준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민준이 슬밋, 웃었다.
그렇게 부르면 안 되냐? 말뿐인 결혼이고 서로 자유롭다며. 그러니 아란이가 누구를 만나 도 너하고는 상관없는 거잖아. 민준이 담배를 끼고 있는 제후의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허전한 네 번째 손가락에 민준의 눈길이 멈췄다.
이게 그 증거야. 권 제후가 은 아란에게 관심이 없다는 증거. 내가 관심이 없다고 다른 놈이 넘봐도 된다는 뜻은 아냐. 드러내놓고 말은 안 했지만 민준을 쳐다보는 제후의 눈에는 분명한 적의가 드러나 있었다.
권 제후 넌 너 할 짓 다 하고 다니잖아. 과 여자애들이랑 밥 먹고 술도 마시고. 그런데 왜 아란이는 안 돼? 걔 이제 스무 살이야. 너만 아니었으면 훨씬 자유롭게 살았을. 결혼은 그 쪽에서 먼저 원했어. 매달린 사람도 그 아이였고. 어른들 성화에 마지못해 박자 맞춰 준 거다?민준이 코웃음을 쳤다.
천만에, 권 제후! 넌 이미 그 애한테 휘둘리고 있어. 제후가 눈썹을 꿈틀, 올렸다.
휘둘려? 신경 쓰이잖아. 만약 다른 놈이 사정 알고 아란이한테 프로포즈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하 고 있잖아. 민준이 손가락으로 제후의 가슴을 쿡 찔렀다.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 내버려두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이 그 이름을 부르는 것도 싫고 관 심을 가지는 것도 싫어. 그걸 가리켜서 보통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질투. 됐어, 그만해라. 지금 얘긴 못들은 걸로 할 테니까 다시 입 밖에 내지마. 피하지 말고 들어.민준은 돌아서는 제후의 등에 대고 말했다.
이번 MT, 가는 게 좋을 거야. 나 그 아이한테 고백할 지도 모르거든. 고백? 허튼 소리 하는 거 아니니까 명심해. 아란이가 싫다고 하면 마음을 접겠지만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그 땐 적극적으로 덤빌 테니까. 한 민준 너 진심이야. 나, 아란이를 좋아해.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생각되는 말을 들어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일 친한 친구가 그냥 여자친구도 아닌 아내를 좋아한다는 것은 제후에게 충격적이었다.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그 땐 적극적으로 덤빌 테니까 설거지를 하는 아란의 뒷모습에 친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허튼 농담으로 남을 잘 웃겨도 진지할 때는 더 없이 진지한 놈이 민준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제후였다.
뭐든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였는데 이번만큼은 제후도 민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 다.
정말로 아란을 좋아해 어떻게 해보려는 마음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얼음왕자의 가면을 깨뜨 리기 위해 연극을 하는 것인지를. 커피 마실래요? 너 거기 좀 앉아 봐. 제후는 아란의 손을 잡아 앉혔다.
왜요? 무슨 할 말 있어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 지 모르겠다.
내 친구가 내 앞에서 널 좋아한다고 했다.
너한테 고 백한다고.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오빠? 아란이 냉전 중인 것도 잊고 덩달아 심각해진다.
제후의 이런 불안한 표정은 처음 본다.
무 작정 붙잡아 앉히더니, 손을 붙잡고 쳐다보고만 있다.
만약에 만약에 내가 너하고 사는 게 계약 때문이 아니라면 넌 뭐라고 할래? 혹시 네가 그만두자 고 말할까봐 겁이 난다면 나더러 겁쟁이라고 할래? 오빠 MT때문에 그래요? 난 안 간다고 했는데. 제후의 입에서 본론이 나오기를 기다리다 아란이 지레짐작해 말을 꺼낸다.
어 왜? 몰랐어요? 그 날 할아버지 생신이잖아요. 친척들이랑 모두 모일 텐데 오빠하고 저도 가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갈 마음은 있었는데 생신 챙기느라 못 간다 이거야? 가야지. 난 또 네가 잊고 있나 해서 물어본 거야. 퉁명스레 대답을 하고 일어나는 제후의 입에선 한숨이 나왔다.
아란이 민준의 고백을 들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그럭저럭 마음이 편했다.
제후는 침실로 들어가다 말고 말을 덧붙였다.
정 가고 싶으면 가든지. 친구들이랑 어울릴 시간까지 빼앗을 자격 나한테 없으니까. 과 대표한테 얘기했어요. 이해하더라구요. MT가면 남자애들이랑 한 방에서 자고 술도 마 시고 그럴 텐데 나 그런 거 싫어요. 그래서 안 간다고 했어요.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해? 네 마음대로 하지.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우린 부부잖아요. 지킬 건 지켜야 하니까 그녀와의 관계는 여전히 그가 위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심한 말을 들었는데도 예의 운운 차리는 걸 보면. 그 때 제후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우리, 여행 갈까? 아란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후가 재차 물었다.
싫어? 할아버지 생신은 어쩌고요? 아침에 일찍 본가 다녀와서 오후에 시간 맞추면 되지. 어차피 MT 있어서 학교도 쉬니까 한 2박 3일 예정해서 바람이나 쐬고 오자고. 둘이서요? 제후는 첫 번째 데이트에서 거절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물었다.
끼워 넣고 싶은 사람이라 도 있어? 아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의외라서 그래요. 의외라니? 오빤 혼자 있는 걸 좋아하잖아요. 나더러 같이 가자고 할 줄 몰랐어요. 지킬 걸 지키는 거지. 부부니까. 제후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결혼한 사람이 아내 떼어 놓고 혼자 여행 간다고 해봐. 단박에 우리 부부 무슨 문제 있어 저런다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걸. 그러니까 오빠 혼자 여행을 가고 싶은데 이상한 소문나는 게 두려워서 나더러 같이 가 자고 하는 거에요? 구색 맞추려고? 그럴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말도 안 했어. 그냥 혼자 훌쩍 떠나서 나 어디 있다고, 전화 한 통으로 끝내버렸겠지. 어떻게 할 거야? 이번은 믿어도 되요? 마음 놓고 오빠한테 의지해도 되요? 아란은 망설였다.
함께 가자. 서로를 더 많이 아는 계기도 되고 좋을 거야. 알았어요, 준비할게요. 불안함에 흔들리는 까만 눈망울. 제후는 그의 제안을 그녀가 못미더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 았다.
아직도 그 말에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아란아. 두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제후는 말했다.
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난 좀 즉흥적인 데가 있어. 감정에 치우치면 가끔 마음에 없는 말을 하기도 하고 곁에 두어도 그립고 보고 싶던 그녀의 향기가 체온에 섞여 코끝을 아찔하게 했다.
그 날 내가 했던 말 마음에 두지 않았으면 해서. 어느 것도 내 진심은 아니었으니까. 미안 하다.
나, 용서해 줄 수 있지? 그럼요. 내가 어떻게 오빠를 미워하고 또 용서한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처음부터 내게 주어진 건 오빠를 사랑하는 마음뿐이었는데 힘들어도 기다려야 한다는 운 명뿐이었는데. 그래요, 알았어요. 제후는 오랜만에 아란의 웃음을 보았다.
그녀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 만졌다.
반듯한 이마와 눈꺼풀과 균형을 잡은 콧날을 따라 제후의 입술이 내려왔다.
화해의 순간에 머뭇거리는 제후의 입술에 아란의 입술이 용기를 내어 닿았다가 떨어졌다.
제후를 올려다보는 아란의 눈에 맑은 물기가 고여 떨어졌다.
약속 꼭 지키는 거야. 제후의 마음속에 아란의 눈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제후는 아란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입맞춤을 했다.
그것은 이내 굶주림을 대변하듯 거친 키스로 바뀌었지만 그의 가슴 속으로 그녀의 간절한 사랑이 스며들고 있었다.
아란아, 밖에서 누가 너 찾아. 경영통계학 2교시 강의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다.
커피를 마시러 나갔던 승원이 찾아온 사 람이 있다며 나가보라고 했다.
누군데? 낸들 아니. 근데 굉장히 잘 생긴 남자야. 찡긋, 윙크를 보내고 승원이 제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남자라니, 누굴까 제후 오빠면 승 원이가 말을 했을 텐데. 아란은 책을 덮고 나갔다.
강의실 복도를 낀 창가에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가 등을 보고 서 있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어 우리 구면이지? 결혼식 때 보았던 제후의 친구였다.
그리고 현재 2학년의 과대표이자 임원을 맡고 있는 사 람이었다.
한 민준 선배죠? 손바람을 일으켜 담배연기를 몰아내며 아란이 콜록거리자, 민준이 담뱃불을 껐다.
맞아. 너 담배 싫어하지? 미안하다.
기침을 멈춘 아란이 민준을 쳐다봤다.
유유상종, 비슷한 사람끼리 모인다더니 외모에서 풍기 는 인상이 제후와 많이 닮았다.
오빠가 뭐 부탁했어요? 아니, 내가 볼 일이 있어서 너 만나러 온 거야. 시간 돼? 민준의 눈이 아란의 왼손 약지에 살핀다.
백금 링 가운데 다이아몬드가 박힌 결혼반지가 손 가락을 둘러싸고 있었다.
통계학 강의가 한 시간 더 남았어요. 그보다 왜 저랑 만나야 하는 건데요? 제후에 관한 거야. 그 녀석 입으로는 절대 말 안 할 비밀. 비밀이면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죠. 본인 직접 듣거나 몰랐으면 몰랐지, 도둑고양이처럼 주 워듣고 싶은 생각 없어요. 잘 아는 사람도 아닌데 왠지 불쾌했다.
돌아서는 아란의 뒤에 대고 민준이 말했다.
그 녀석 반지 안 끼고 다니는 거 알아? 그래서요? 아란은 문간에 걸쳤던 발의 방향을 바꿨다.
좀 미안한 소리이긴 한데 나 너희들에 대해 알고 있어. 이 결혼, 어른들의 필요로 묶여졌 고 본인들 사이엔 아무런 애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 말야. 공공연히 떠도는 소문을 가지고 협박이라도 하러 온 건 가요? 제법인데 은 아란. 제후 얘기라면 무조건 따라올 줄 알았더니 이거 보통 내기가 아니잖 아? 아까의 배려를 잊은 듯 민준이 담배를 다시 꺼냈다.
떠도는 소문이라도 근거는 있기 마련이지. 자기를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랑 사는 거 힘들 지 않아? 심리학을 전공하기라도 했는지 민준이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아란을 당황스럽게 했다.
그건 선배가 참견할 일이 아니에요. 오빠하고 내가 알아서 할 문제죠. 좋아하지? 뭐라구요? 잡아 뗄 생각 하지 마. 일부러 계약이란 말을 꺼내서 그 녀석 호기심을 자극하고 관심을 끌려고 한 것도 다 알고 있으니까. 뭘아란은 반박을 하려다 단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배가 뭘 원하고 왔는지는 몰라 도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거에요. 안녕히 가세요. 때마침 복도를 걸어오는 교수님의 모습을 핑계 삼아 아란은 강의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서 두르거나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민준은 혼자 웃음을 지었다.
좋아.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이번엔 다시 제후 녀석을 찔러 보러 가야지. 임마, 어디 갔다 오냐? 전공 수업까지 빼먹고. 점심시간이라 북적대는 학생 식당. 강의 시작 5분 전 대출(代出)을 부탁받았던 서훈이 민준 을 보고는 볼멘소리를 했다.
알았어, 새꺄. 오늘 저녁은 내가 쏜다.
밥 한 끼 사는 걸로 끝날 생각 마. 어림도 없어. 대출 한 번 해 준 것 갖고 재기는아아, 알았어! 2차까지 책임지면 되잖아. 서훈의 넉살과 주먹을 받아준 민준은, 제후가 보이지 않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근데 이 놈은 어디 갔냐? 누구, 제후? 아까 강의 끝나자마자 발이 안 보이게 뛰어나가더라. 만날 사람 있나보지. 아란이? 꼭 부부라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요즘 학교에서도 자주 어울려 다니더라고. 그리고 넌 아 무리 같은 과 후배라고 해도 그렇지 친구 부인 이름을 막 부르냐. 아란이가 뭐야, 아란이가? 서훈이 핀잔을 주자 민준이 속을 감추면서 웃었다.
부르라고 지은 이름이야. 제후 그 놈만 아니었으면 내 여자가 내 여자가 됐을 사람이라고?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민준의 말을 잘랐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제후가 서서 친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해 봐, 그래? 그래.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눈과 눈이 싸우고 있었다.




민준이 의자를 빼고 일어나 제후에게 걸어갔다.
어쩌다 재수가 없어 네 놈 품에 들어간 거지, 원래 아란이는 내 여자가 될 운명이었어. 정 확히 말해 빼앗긴 거지. 그것도 하필 친구라는 이름을 가진 권 제후한테. 야야, 너희들 왜 그래?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말들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챈 서훈이 밥 먹던 걸 팽개치고 따 라 일어났다.
여차하면 싸움이 벌어질 것처럼 보이는 험악한 분위기였다.
조 서훈 너 못 들었어? 한 민준, 이 자식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 내 말이 어때서?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한 게 잘못이냐? 얼음 왕자 권 제후가 여자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퍽! 제후의 http://kccc.me/naver/827.html 주먹이 민준의 얼굴로 날아갔고 민준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터진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민준이 비웃는 시선으로 친구를 올려다봤다.
꼴에 남자라고 맷집도 있었네. 다시 봤어, 권 제후. 죽기 싫으면 그 입 닥쳐, 한 민준. 살기였다.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제후의 주먹은 금방이라도 민준의 턱을 날려버릴 것처럼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럴 수 없다면 어떡할래? 민준이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내가 아란일 차지하기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다면? 친구 관계도 끊어버리고 너와 기꺼이 싸울 준비도 되어 있다면 어떡할래? 절친했던 친구가 싸움을 걸고 있다.
부인하고 싶지만 눈앞에 있는 민준의 모습은 명백한 현실이었다.
제후는 가슴이 막막해지면 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란이, 좋아하는 사람 있다.
민준이 히든카드를 내밀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지 않아? 당연히 알고 싶었다.
하지만 제후의 입에선 반대의 반응이 나왔다.
돼먹지 않은 거짓말로 자극할 생각이면 관 둬. 아까 만나고 왔다.
돼먹지 않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야. 누굴 만났다는 건지는 묻지 않아도 알고 있는 제후였다.
대학 근처에 새로 생긴 레스토랑에 서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하고 아란을 찾아갔었다.
그런데 길이 엇갈렸다.
그녀의 친구인 승원은 통계학 강의가 끝나자마자 몸이 아파 오후에 있는 강의는 듣지 못할 것 같다면서 아란이 집에 갔다고 했다.
또 어떤 남자가 아란을 찾아왔었다는 말도 전해주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하여간 대 화를 마치고 들어온 아란이 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더라는 얘기까지도. 그런데 뭐가 진실이라는 거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신경 쓰는 거지? 한 민준. 일식(日蝕) 후의 하늘처럼 심장을 가렸던 시커먼 어둠이 물러나고 있었다.
알 것 같았다.
아란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아란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민준의 얘기 에 왜 이처럼 동요하고 있는지. 제후는 핏속을 떠돌아다니던 얼음조각들이 하나 둘 녹아내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널 인정한다.
하지만 아란이는 너와 나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 가질 전리품이 아니야. 그래서? 너에게 아란이가 물러날 수 없는 진심의 대상이라고 해도 어떤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그 앨 너한테 보내는 일은 없을 거다.
은 아란은 이미 내 아내고 그러니 누구한테도 보내지 않아. 설사 나랑 사는 게 그 앨 불행하게 만든다고 해도 제후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왔다.
고백일 수도 있는 제후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학 생들의 웅성거림이 따라왔지만 모른 척 했다.
한 민준, 왜 그랬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자리에 앉아 식어버린 오므라이스를 먹고 있는 민준을 보며 서 훈이 물었다.
너 친구 여자나 건드리고 그럴 놈 아니잖아. 앉아. 앉아서 남은 밥이나 먹어. 서훈은 대답을 해주기 전까지는 밥도 내팽개쳐 둘 것처럼 팔짱을 끼고 앉아선, 부지런히 숟 가락을 움직이는 민준을 쳐다봤다.
알고 싶냐? 내가 왜 사람 많은 데서 미친 짓 했는지? 그거야 뻔하잖아. 제후랑 아란이랑 잘 되게 해주려고 연극한 거 아냐. 미련 둔탱이 손자 놈 좀 어떻게 해달라고 제후네 할아버지가 돈 주면서 시켰지? 민준이 고개를 끄덕끄덕 웃었다.
http://ccc1.me/naver/827.html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공범 노릇하느라 애썼다.
이 일, 제후한테는 끝까지 입 닫아라. 할아버지의 예순 다섯 번째 생신 당일(當日), 제후는 아침 일찍 아란을 데리고 청담동 본가 를 찾았다.
어렵기만 한 시할아버지에게 인사드리기 무섭게 손님들이 몰아 닥쳤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아란은 시할머니와 도우미 아주머니 옆에서 음식을 나르고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람 하나 더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일도 많은데. 옆에 둘 틈이 없는 아란을 보며 제후가 불평을 했다.
도무지 허리 펼 틈이 없잖아요. 예뻐하고 옆에다 두기만 하셔도 모자랄 판에 어린 애 불 러서 일이나 시키고 이게 뭐예요? 투덜투덜, 손자는 말이 늘었다.
생전 제 일 말고는 관심도 없고 다른 사람 챙길 줄도 모르는 놈이었는데 짝을 지워주고 나서는 달라졌다.
권 회장은 새삼 손자를 일찍 결혼시킨 게 잘한 일이지 싶었다.
이틀 전 손주의 친구 놈한테 연락이 왔다.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으니



염려 않으셔도 좋 다고. 좀 서툴러서 그렇지 서서히 사람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고. 제후야. 권 회장은 틈만 나면 아내의 뒷모습만 눈으로 쫓아다니는 손자에게 개량한복의 주머니에서 비행기표 두 장을 꺼내 내밀었다.
네가 부탁한 거다.
비행기는 김포에서 2시고 제주도에 도착하면 호텔에서 보낸 리무진이 마중 나올 게다.
번거롭다고 신혼여행도 안 갔던 놈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게야? 저희들 잘 사는 모습 보는 게 할아버지 소원이잖아요. 퉁명스런 대답에도 웃음이 나오는 권 회장이었다.
그거야 그렇지. 증손자 보고 싶지 않으세요? 사내구실을 하기에는 서울이 너무 뻑뻑하고 요란스럽더냐? 조용한 곳에 가면 일이 더 잘 풀리는 것도 사실이죠. 할머니. 제후는 어깨를 으쓱하고 할아버지가 건넨 비행기표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할머니를 부르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있지 않고 왜 나왔어. 노사모가 방금 부쳐낸 전을 접시에 담으며 돌아섰다.
제후는 친손녀처럼 할머니 옆에서 일손을 돕고 있는 아란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사실 어리 광 부리고 만든 거 집어먹기만 해도 귀여움을 받을 나이의 그녀였다.
아란이 좀 잠깐 빌려가려고요, 괜찮죠? 앞치마를 두르고 시할머니에게 해물전 부치는 걸 배우고 있던 아란은 느닷없이 손목을 낚아 채서 방으로 끌고 오는 제후 때문에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에요? 나 할머니 도와드려야 되는데. 도우미 아줌마는 폼으로 부른 줄 알아? 앞치마 풀고 앉아봐. 제후는 행여 누가 들어올까 봐 문까지 걸어 잠근다.
음식 접시를 들고 오가느라 힘들었는지 주먹으로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아란이었다.
이거. 아란은 제후가 건네는 표를 받아들었다.
오늘 날짜의 비행기표였다.
제주도로 결정했어요? 어. 아란이 표를 들고 이리저리 살핀다.
제후도 아란의 표정 변화를 살피며 그녀의 말을 기다린 다.
잘 됐다.
나 제주도 한 번도 못 가봤는데. 진짜? 아란이 웃는 얼굴에 기분이 좋아졌다.
한편으론, 남들은 수학여행이다 신혼여행이다 숱하게 가는 제주도 구경 한 번 못 해본 사연이 궁금해진 제후는 다가가 아란의 어깨를 감싸고 나란히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가장야한사진 초등학교 수학여행 땐 경주로 갔고 중학교 고등학교 수학여행 땐 못 갔어요. 아란은 이유를 묻는 제후의 시선에 웃는 듯 마는 듯 말을 덧붙였다.
새엄마가 사춘기 여자애는 먼 데 나가서 바람 쐬고 그러면 좋은 거 없다고 아빠한테 그랬 거든요. 나, 사실 대학도 간신히 온 거에요. 대학도 안 보내려고 하셨단 말야?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딸을 고등학교까지밖에 안 보 내? 재혼하고 나서 아빠는 새엄마하고 일밖에 몰라요. 내가 뭘 원하는지 내 꿈이 뭔지 관심도 없고 그냥 대학 졸업하면 시집보내는 게 나에 대한 아빠 계획의 전부였어요. 제후는 양가 상견례가 있던 날, 아란의 아버지와 새 어머니가 보였던 행동들을 떠올렸다.
스 무 살을 갓 넘긴 딸을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시집보내는 부모의 애틋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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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9 00:22 2011/08/09 00:22
가슴이큰여자
분류없음 2011/08/09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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